루머메이커
written by 다강
(@WXdagang)
너 어제 농구 리그 준결승 봤어?
봤지! 마지막 덩크슛! 어제 친구가 직접 갔었다고 영상도 보내 줬어!
팔 길이 좀 봐. 애인 있겠지?
헐, 오늘 션 인문학관인가봐.
사진 봐봐, 와, 코트 핏 좀 봐.
저런 애는 누구랑 사귈까?
저렇게 핫한데, 끼리끼리 만나지 않겠어?
루머 메이커
제목 : 농 구 부! 결 승 진 출!
[동영상]
ㄴ스몰 포워드 누구냐? 개 쩔던데
ㄴ이보라던데
ㄴ이미 4점 차였는데 마지막 버저비터는 쇼맨십이지
ㄴ그래서 왕이보 덩크 쩔었냐? 안쩔었냐?
제목 : Sean’s OOTD
[사진]
ㄴ고마워 친구! 사랑해 션!!! 마이 프린스!
ㄴ오리지널 로우 덩크 저거 얼마 전에 700불까지 올라갔던데.
ㄴ근데 본인은 이렇게 사진 올라오는 거 아는 거야?
ㄴ모를리가 있나ㅋㅋ 즐기겠지ㅋㅋ
ㄴ다 필요없고, 얼굴이 패션의 완성
“이보, 내 운동화 캐비닛에 넣어 주는 거 잊지 마!”
“오케이.”
경기의 끝을 알리는 버저비터 소리와 승리의 순간은 늘 짜릿하게 전신을 관통한다. 이보는 뒷풀이 후 신세를 졌던 같은 팀 포인트 가드, 썸머의 차에서 내려 스케이트 보드를 밀었다. 운동화와 유니폼만 든 가방을 등에 매고 아스팔트를 구르는 바퀴 소리가 경쾌하다. 이보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한 번씩 뒤로 쓸어 넘겼다. 그가 빠르게 교내를 가로 지를 때마다 주변의 힐끔대는 시선과 웅성거림이 들렸다.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주변의 모든 소음을 막아주지는 않았다. 이따금 이보와 안면을 튼 선후배들이 “덩크 쩔더라!” 아는 체를 했다. 학교에서 그를 쫓는 시선이야 이미 익숙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완벽했던 버저비터 슛을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니 순식간에 부실 앞인지라 두껍고 낡은 철제 문을 연다. 어제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 오전 연습에 참가했던 부원들이 이보를 맞았다.
“헤이, 벌써 왔어?”
“응, 썸머 형 심부름.”
“어제 영상 장난 아니던데. 벌써 추천 수 장난 아냐.”
“그래?”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인지라 이보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보는 썸머의 지저분한 캐비닛에 운동화를 박아 넣고 제 캐비닛에서 오전 수업 교재들을 꺼냈다. 어차피 반쯤 졸겠지만 출석수는 채워야 했다. 그가 가벼운 짐만 챙겨 부실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어, 그 운동화.”
“왜?”
“그거 엊그제 션이 신은 거잖아.”
“션?”
“그 시니어에 유명한 중국인 있잖아.”
“아아-”
이보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 짙은 초록색이 포인트인 덩크화는 최근 이보가 가장 아끼는 것으로 얼마 전 매장 오픈 전부터 줄을 서 가면서 구매한 것이었다. 원래라면 아까워서 스케이트 보드를 탈 때 절대 신지 않겠지만, 어제 경기도 기분좋게 마쳤고 어쩐지 이 녀석을 꼭 신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하필 다른 사람이 똑같은 걸 샀다고? 이름은 들을 때마다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교내에서 ‘시니어의 유명한 중국인’하면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청순한 이목구비와 다르게 마르고 큰 키에 모델 같은 착장이 자주 눈에 띄는 사람. 실제로 보면 더 비율이 좋아서 깜짝 놀라곤 한다는, 샤오 션이다. 이보도 그의 사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학교 커뮤니티에 마치 아이돌처럼 매일 그의 착장 사진이 올라 오곤 했으니까. 이따금 이보도 그의 사진을 보고 오, 저 니트 사고 싶다- 막연히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얼핏 사진을 넘기기에도 아웃도어파인 저와 정반대의 인상이라 이런 덩크화도 신는 줄은 몰랐다.
“몰랐는데. 패션용으로도 나쁘진 않지.”
독특한 패션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저가 다른 사람을 따라했다는 말투는 기분이 나빴다. 이보는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밖을 나섰다. 그러나 오래 갈 서운함은 아니다. 사람들이 겨우 이보의 운동화에만 관심을 갖진 않았으니까. 이보는 썸머에게 그의 운동화를 잘 넣어두었단 메시지를 보냈다. SNS 아이콘에 자신이 태깅되어 쌓이는 숫자는 무시한지 오래였다. 어제 경기 마지막을 장식한 덩크슛이 어제 올라온 경기 하이라이트 중 조회수 1위라든지, 그가 오늘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지나가더란 말이 벌써 카페 테리아에서 퍼지고 있었다든지, 그와 관련해 퍼지고 있을 이야기가 워낙 많아 하나하나 다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결국 소문들은 다시 제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아마 평소와 같았다면 그 이름은 또 이보의 머릿속에서 또 금방 잊혀 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 딱 마주쳤다. 이보가 늘 귀가 후 물티슈로 꼼꼼히 먼지를 닦으며 애지중지하는, 똑같은 초록색 로우 덩크를 신은 남자, 샤오 션과.
***
이보의 귀가가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었다. 이건 문제되지 않는다. 집에 가는 길에 농구 코트를 쓰고 있는 동기들을 만난다든지, 갑자기 자동차 극장에 가기로 한다든지 그런 일은 예사였다.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길가에 이보의 스케이트 보드가 아스팔트를 구르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는 다시 힘없이 한 번 발을 굴렀다가 결국 보드를 멈추고 발로 보드를 세워 옆구리에 끼웠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 대신 이보의 한숨이 길목을 채웠다. 마지막 수업이었던 문학이 문제였다. 이보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과목과는 담을 쌓아 매번 졸기 일쑤였는데, 담당 교사가 수업 후 그를 불렀다. 지난해에 부임했다던 그는 이보를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문학의 즐거움을 모른 채 보내도록 방치하는 것이, 자신의 교사로서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보에게 수업 후 삼십 분 동안이나 지금까지 그가 제출했던 과제들을 다시 꺼내며 그가 얼마나 무성의하게 텍스트들을 해석했는지, 그 안에 내포된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것들을 설명하다가 마무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문학적인 관점에서 작성한 페이퍼를 제출하라는 거다. 이보는 황당해졌다. 평소처럼 경기 핑계를 대는 이보에게 교사가 네가 과제를 제출하지 않겠다면 안타깝지만 D를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D? 이보의 눈이 그 여느 때보다 커졌다. 차라리 F라면 드랍을 할 수라도 있지, D는 아니었다.
“열받아!”
이보는 돌부리 하는 평화로운 길에도 화가 나 이미 행인에게 수차례 밟혔을 나뭇잎을 거칠게 걷어찼다. 그래봐야 그의 운동화 밑창만 거칠게 긁힐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기분으론 아무 것도 안되겠다. 이보가 핸드폰에서 썸머의 이름을 찾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두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소음에 발걸음을 멈춘 건, 그 대화가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여서다.
“-그래서 오늘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못믿는거야? 날?”
“그럼 돈 말고 뭘 보고 내가 널 믿는데?”
“문학이 알면 어떻게 해?”
지금 그를 가장 짜증나게 만든 장본인의 이름에 이보는 몸을 돌렸다. 남의 얘기를 듣는 취미 따위 정말 없었지만 마침 지나가야 하는 블록의 바로 앞에서 떡하니 들려오는 목소리니 어쩔 수 없었다.
“안 걸리는 건 네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이보가 벽에 붙었다. 남자들의 다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초조한 듯 자꾸 발로 모래를 뒤적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반면, 맞은 편의 남자는 평온했다. 그의 다리를 보던 이보는 기시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익숙한 운동화였다. 이보가 신은 것과 똑같은 초록색 로우 덩크. 오늘 같은 신발을 신었다던, 그러니까—
“션, 네가 그렇게 당당해도 될 거 같아?”
남자가 션에게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간 침묵이 감도는 것에 이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데 갑자기 피식, 션의 웃음 소리가 났다.
“풉, 너 그딴 사진으로 협박하는 거야?”
“뭐?”
“네가 말한 그 잘난 돈이 찍히길 했어, 뭘 했어. 내 사진 필요하면 직접 찍지말고 커뮤에서 다운받아. 거기에 더 잘 나온 게 많거든.”
“돈 받는 주제에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왜 이래? 먼저 소문 듣고 연락한 건 너잖아. 용건 없으면 빨리 말해, 내 시간 뺏지 말고. 너말고도 필요하단 사람 줄을 섰어.”
“누가 필요 없대?!”
션의 맞은 편에 섰던 남자가 씩씩 대며 발을 굴렀다. 뒷얘기를 들어보니 대충 각이 나왔다. 저, 학교에서 프린스로 유명한 샤오 션이 자기 페이퍼를 돈으로 파는 모양이었다. 알음알음 그런 녀석들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보는 그렇게까지 성적에 집착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렇게 비겁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간다면 징계감인 건 당연했다. 학교에서 존재감이 흐릿한 너드들도 아니고 유명인사라니, 이보는 기가 차 저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를 끝까지 듣고 말았다. 아무래도 남자는 션이 과제를 뒷거래를 한다는 걸 협박 삼아 그에게서 공짜로 갈취할 속셈이었던 것 같았다. 멍청한 탓에 휘말린 모양이지만. 늘 게시판에서 프린스니 뭐니 하는 찬양의 글과 상쾌하게 찍힌 사진만 봤던 이보는 그의 시니컬한 말투에 놀라고 있었다.
남자는 제풀에 지쳐 씩씩대더니 몸을 훽 돌렸다. 이보와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놀라 이보는 몸을 돌려 벽에 바짝 붙었다. 이러다 들키면 더 부자연스럽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몇 초가 지나자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간 모양이었다. 이보가 속으로 안심하며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을 때였다.
“야.”
“으악!”
그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샤오 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미간이 슬쩍 구겨진 그가 이보를 내려다봤다.
“역시 왕이보였네.”
“어-“
“이 근방 중국인 중에 널 모르는 사람 없을 걸.”
이보가 당황해 눈을 깜박이는 사이 어느새 샤오션의 말투는 방금 제가 들었던 까칠한 목소리가 아닌 친절이 듬뿍 묻은 목소리였다. 이보는 혹시 조금 전 자신이 뭔가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 그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로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굴렸다. 하지만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은 분명 로우 덩크가 맞았다. 그러는 사이 션이 가방을 고쳐 메며 말했다.
“왜, 너도 나한테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
“아니면 뭐, 그쪽 취향이야?”
분명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마지막 말투는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차가웠다.
“무, 무슨 소리에요, 나 여자 좋아해요!”
이보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션이 킥킥 웃었다.
“하하, 나한테 찾아오는 남자들이 둘뿐이라.”
그가 여전히 반짝반짝하게 웃고 있어서, 이보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겨우 손바닥 두 개 정도의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자니 그가 왜 ‘프린스’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지 알 것 같았다. 웃음기를 띄고 있는 커다란 눈매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이보는 잠시 고민했다. 원래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고, 지금까지 거의 마주 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마 앞으로도 그와 만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는 눈앞에 목표가 보이면 그걸 지나치는 성격이 못되었다. 그는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나 봤어요.”
“응, 뭘?”
“페이퍼, 돈 받고 파는 거잖아요.”
“역시 봤구나.”
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는데도, 이보는 그 목소리에 베인 것처럼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고발이라도 할 거야?”
“…어차피 아무도 안 믿어 줄 거 같아요.”
전혀 긴장되지 않는 태도로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는 샤오션을 보며, 이보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학교의 프린스가 사실 과제 갖고 뒷거래를 하고 있었다고? 말도 안 돼. 너 질투하냐? 얼굴도 흐릿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보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션은 그 퉁명스러운 대답이 뭐가 마음에 든 건지 쿡쿡 웃었다.
“저도 알아요, 당신…… 샤오션 씨.”
“아, 그건 영어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샤오잔이야.”
“네, 아무튼… 재벌 2세라면서 그런 짓을 해요?”
“아아, 그거. 별별 소문이 다 생겼던데 우리 집 그냥 식당해.”
본가가 충칭인데, 내 친구라고 말하면 많이 주실 걸. 샤오잔은 이보가 기대어 있는 벽에 제 어깨를 툭 기대며 말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시선의 높이가 이제 이보와 거의 같았다. 이보는 잠깐 멈춘 사고를 애써 굴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근데 그냥 두는 거예요?”
“나한테 딱히 나쁠 것도 없는데, 정정할 필요 없다 싶어서.”
누가 이 사람을 상냥하고 친절한 남친의 정석이라고 한 거야? 이보는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다른 성격에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소문 내도 상관없어. 근데 과연 얼마나 믿을까?”
샤오잔의 얼굴에 자신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도 알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교내에서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공고한 저의 위치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란 것을. 그래서 이보는 다소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 페이퍼, 나한테도 팔 수 있어요?”
“그럼. 다음에 지갑 챙겨 와.”
잔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깜빡 잊고 있었다는 것처럼 핸드폰을 터치해 들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2분 남짓한 음성 녹음 화면이 떠 있었다.
“아마 내 이름 옆에 네 이름도 나란히 뜰 수도 있을 거야.”
해사한 잔의 미소에 이보의 안색이 파리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