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내린 볕
수면제 약물을 통한 자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written by Dizz
누나한테서 급하게 걸려온 연락은 반가운 소식이었던 적이 없었다. 샤오잔은 한숨을 쉬었다. 일요일 오전부터 현관 앞에 서 있는 저보다 앳된 얼굴의 남자애와 커다란 트렁크가 샤오잔을 절로 떨떠름하게 만들었다.
샤오잔이 제 바로 앞에서 한숨을 쉬자 남자애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고, 그걸 본 샤오잔은 껄끄러웠다. 앞에 있는 사람이 뻔히 선택지가 없는 걸 알면서도 언짢은 기색을 내비친 게 괜히 실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샤오잔은 남자애 옆에 덜렁 놓인 캐리어를 잡아 먼저 집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남자애는 머뭇대면서도 이내 샤오잔을 따라 샤오잔의 집으로 들어왔다.
“저기...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누나한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샤오잔이에요.”
“네. 저는... 아시겠지만, 왕이보에요.”
그 이름은 이 나라에 살고 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왕이보의 이력은 전 국민이 대충은 알고 있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가 여섯 살 때, 아역으로 참여한 첫 작품이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켰었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 밀리지 않을 정도의 연기력으로 평가받은 왕이보는 그다음 작품도 히트하며 거기서도 좋은 연기를 했다고 평가받았다. 그 이후로는 작품의 흥행에는 기복이 있었지만, 연기나 작품성 면에서 차근차근 괜찮은 필모를 쌓아간다는 평을 받던 왕이보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로로 또 한 번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그 작품은 쟁쟁한 국제 영화제에 노미네이트 된 걸 시작으로 수상을 시작해서 거머쥔 트로피의 총합이 수십은 되었다.
그렇게 화려한 이력을 가진 왕이보가 지금 다소 한적한 군소도시에 사는 샤오잔을 찾아오게 된 건, 얼마 전 소위 말하는 가족의 채무 문제로 인한 분쟁이 전국적으로 기사화되면서였다.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어도 가족이 본인의 이름을 이용해 빚을 만든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 분쟁은 피해자의 수나 액수의 규모 때문에 꽤 대대적인 스캔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일들이 연예계에서 아주 드문 건 아니었다. 그 업계에서 종사하는 누나를 두고 있으니 샤오잔은 알음알음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강하듯, 화려한 쇼비즈니스 업계의 뒤엔 아득할 정도의 사연을 가진 기구한 이들은 많았다. 어쩌면 왕이보도 그중에서는 비교적 불행한 축이 아닌 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한들 개인적인 치부가 만인에게 널리 알려지는 건 다른 일이었고, 의도한 일이 아닌 경우엔 더욱 그랬다. 왕이보의 경우 두 가지가 다 해당하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왕이보의 가족이 진 채무 문제가 알려진 지 꼭 일주일이고, 사람들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의 문제를 자잘하게 쪼개서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그렇게 일파만파 퍼지던 중에 샤오잔의 누나가 왕이보를 샤오잔에게 얼마간 맡아달라 부탁을 해왔다. 샤오잔 입장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샤오잔이 프리랜서로 독립을 하기 전에도 이따금 제 누나가 집에 회사의 스태프나 연습생 등을 머물게 해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체나 그렇듯 귀퉁이부터 금이 가서 부스러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짧은 기간만 같이 지낸다고 해도 지치기 마련이라.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감당하기도 힘든데, 저보다 여섯이나 어리고 최근 큰 구설수가 있던 배우. 그와 같이 있는 순간을 생각만 해도 피곤해져 거절하려던 샤오잔은 이어지는 누나의 말에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얘 얼마 전 새벽에 병원에 실려 갔었어. 수면제 때문에.”
“...”
“본인 말로는 잠이 안 와서 먹다 보니 그랬다던데, 그냥 네가 당분간만 좀 봐줘. 이쪽은 너무 이목이 많아서... 부탁할게. 응?”
그런 말을 듣고도 왕이보를 거절할 정도로 샤오잔은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금 왕이보가 샤오잔의 집 안에 캐리어 째로 들어와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었다. 샤오잔은 목을 매만지다가 왕이보에게 대략 안내했다.
“보시다시피 여기는 부엌, 여기는 거실, 여기... 여기가 화장실. 그리고 저 방은 제가 서재로 쓰는 곳인데 당분간 제가 저기서 잘게요. 왕이보 씨는 침실을 쓰면,”
여기까지 샤오잔이 말했을 때 왕이보가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그냥 저는 거실이면 돼요. 침실은 조금.”
왕이보는 과한 호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낯에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오래 배우 생활을 하고 그렇게 인기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왕이보는 유명세에 따라 거드름 피우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샤오잔은 고개를 선선히 저었다. 침실을 그에게 내주는 게 어차피 왕이보를 대접하려는 이유는 아니었다. 제가 자주 움직이는 동선에 타인이 자리하고, 그 모습이 기억으로 남는 게 싫어서 문을 닫고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내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샤오잔에겐 왕이보가 침실로 들어가는 편이 좋았다. 다만 왕이보가 생각보다 거만하지 않더라도 잔뜩 예민한 상황이니 이유를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한 샤오잔은 대강 에둘러 말했다.
“제가 원래 거실에 뭘 두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정신이 사나워서요. 저 방이 침실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잘 안 쓰니까 그냥 왕이보 씨가 거기 쓰시는 편이 제가 편해요.”
“아…”
“그럼 일단은 캐리어 놓고 옷 갈아입고 올래요?”
망설임이 남았는지, 머뭇대는 왕이보의 등을 샤오잔이 침실 쪽으로 떠밀었다. 왕이보는 쭈뼛거리며 들어가더니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샤오잔은 식탁에 앉아 왕이보에게 제 맞은편을 두고 턱짓했다. 왕이보는 그 턱짓의 의미를 재깍 알아듣고 샤오잔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마주 보면서 한 건, 몇 개의 규칙을 정하는 일이었다.
화장실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는 격주로 번갈아 하기, 서로의 취침과 식사 시간을 터치하지 않기, 외부인을 들이지 않기. 나머지는 융통성 있게 그때그때 보면서 하기로 했다. 어차피 긴 동거가 아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구획을 나누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대략 가이드라인을 정한 샤오잔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그럼 당분간이지만 편하게 지내요.”
그 말을 남기고 딱 선을 긋는 듯 서재라 소개한 방으로 쏙 들어가는 샤오잔을 보면서 왕이보는 한동안 닫힌 문을 멀거니 바라보다 일어났다. 나쁘게 지낼 건 없지만, 꼭 가까이할 이유도 없어서 유감은 없었다.
기껏 취침과 식사 시간을 터치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 왕이보와 샤오잔은 며칠 지내며 식탁에서 자주 마주쳤다. 처음에는 얼추 활동 시간대가 맞는구나 한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하고 각자의 식사를 알아서 차려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어딘지 고리타분한 면이 있는 샤오잔의 눈에 왕이보의 식사가 자꾸 걸렸다.
왕이보는 샤오잔이 언뜻 봐도 굉장히 마른 편이었는데, 저렇게 먹어서 말랐나 싶게 부실한 식사를 하곤 했다. 대부분의 끼니를 인스턴트 도시락, 가끔 빵이나 외식을 하는지 음식점의 봉투와 일회용 용기에 든 갖가지 음식으로 때우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도 맛있게 먹었으면 모르겠는데, 왕이보는 정말 조용하게 일을 하듯 음식을 씹어 삼켰다. 샤오잔은 며칠 그 꼬락서니를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했다.
“저기. 밥은 원래도 매일 그렇게 먹어요?”
“네?”
“밥. 제대로 안 먹는 거 같아서요.”
“아... 보통은 거의 외식이 많아서, 요리할 줄 몰라요. 여긴 매니저 형도 없고, 집도 아니고요.”
늘어놓는 얘기를 듣다 보니 퍽 답답해진 샤오잔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왕이보는 샤오잔을 그저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멍한 표정을 보다 샤오잔은 결국 처음에 제가 먼저 내밀었던 규칙을 살짝 뒤로 물리기로 했다.
“왕이보 씨. 어차피 밥 먹는 시간 비슷한 거 같은데, 나랑 같이 먹을래요? 내가 해줄게요.”
“네? 밥요?”
“그렇게 먹다가 몸 상해요. 어차피 1인분이나 2인분이나 손 가는 건 비슷하고.”
“...아.”
샤오잔의 제안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 얼굴이 또 제가 알고 있던 배우 왕이보랑은 거리가 멀어서, 샤오잔이 픽 웃으며 농담을 덧붙였다.
“나이가 들수록 목숨을 좀 아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혹시 못 들어봤어요?”
왕이보가 그 말에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직 그런 얘기 들을만한 나이가 아니라서…”
“...아. 아직 젊으시지. 그렇네요. 그렇겠네. 좋겠다. 부럽다.”
농담하려다 본전도 못 찾은 샤오잔이 부러 왕이보에게 눈을 흘기며 팔짱을 꼈다. 대놓고 빈정대는 대답을 하면서도 샤오잔의 목소리에 묘하게 웃음기가 있어서 왕이보는 그제야 그게 샤오잔의 농담인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실수한 기분이 든 왕이보는 샤오잔의 팔을 턱 하니 붙잡았다. 팔을 잡힌 건 좀 놀랄만한 일이라 샤오잔이 눈을 깜빡이며 왕이보를 보자, 왕이보는 제 손과 샤오잔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샤오잔 씨도 아직 그런 얘기할 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허.”
“진짜로. 진짜로요. 누가 보면 제가 형이라고 생각할걸요.”
“밥해준다니까 아부하는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고. 정말 감사한 데, 그건 아니고요.”
갈수록 매끄럽게 수습이 안 되는 걸 왕이보도 알고 있는지 귀가 빨개지고 있었다. 샤오잔은 이쯤 해서 밥을 먹어도 여러 번 더 먹은 자신이 매듭을 짓기로 해서 제 팔에 붙은 왕이보의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다 알겠으니까. 다음부터 같이 밥 먹어요.”
“...네.”
“대신 설거지는 맡겨도 되죠?”
“네? 네! 당연하죠.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왕이보의 올라붙은 뺨이 퍽 뽀얗게 보였다. 엉망으로 먹고 다니던 며칠이 생각이 난 샤오잔의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매일 같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이야기가 음식 옆에 놓였다. 왕이보는 대체나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는 편이었고, 샤오잔도 마찬가지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화들을 꺼냈다. 그림으로 외주를 받는 작가와 배우인지라, 일 적으로는 둘 다 접점이 전혀 없다 보니 생각보다 이야기는 가벼운 선을 지켜 흘러가곤 했다.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이 풀렸다. 사소한 얘기들 속에 나타나는 일면들이 한둘씩,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로 가서 덧씌워진 탓이었다.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 점차로 내가 직접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다 보니 집 안의 풍경도 서서히 변했다. 각자의 방에만 딱 붙어 있던 두 사람은 부엌이며 거실이며 한 공간에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같은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제 따로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게 태반이었다. 왕이보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샤오잔은 노트북으로 뭘 확인한다든지, 샤오잔이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볼 때 왕이보는 TV를 작게 틀고 지난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며 이따금 웃는 그런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상대를 일부러 의식하면서 관찰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는데, 샤오잔에겐 왕이보가 창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는 점이 그랬다. 왕이보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아 바깥을 보는 일이 많았다. 어떤 날은 밖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그저 멍하니 있는 날도 있었다. 거실에서 낮에 해가 제일 잘 드는 곳에 꼭 자리 잡고 앉은 왕이보는, 몸에 힘을 주지 않아 등이 약간 굽어있을 때가 많았다. 샤오잔은 어쩐지 그 완만한 등을 볼 때면 말을 걸고 싶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왕이보가 제집에 자리했다는 기억을 남기기 싫어 침실을 줬던 그때의 마음은 어디론가 증발한 지 오래였다.
하루는 바깥 구경에 여념이 없는 왕이보 옆에 샤오잔도 앉았다. 왕이보가 샤오잔을 잠깐 돌아보았다.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샤오잔은 대수롭지 않게 가져온 물잔을 왕이보의 손에 쥐여주며 물었다.
“밖에 보는 거 좋아해? 자주 보길래 궁금해서.”
“밖이 예뻐서요.”
왕이보의 말에 샤오잔도 창 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샤오잔의 집은 꽤 높은 층이라 시야에 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먼 데까지 난 도로를 따라 쭉 심어진 커다란 가로수들이 보였다. 늦가을에 다다른 때라 푸릇한 맛은 없었지만, 대신 알록달록한 모습이었다. 보고 있자니 오래전 집을 계약할 때, 이 풍경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떠오른 샤오잔이 여상스레 대답했다.
“그러게. 예쁘네.”
“...”
“그치만 더 좋은 거 훨씬 많이 봤을 거 같은데. 좀... 뭐 모르는 소린가.”
“너무 어릴 때부터 바빠서 이런 게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어요.”
“그래?”
“네. 되게...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거 쳐내기 바빴어요. 근데 그게 너무 지루했어요. 맨날 정신없긴 했었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랬구나.”
짧은 말에서 왕이보의 피로가 엿보였다. 그게 묻어나 샤오잔은 절로 왕이보를 흘끗대며 살폈다. 막연히 긴장했던 것과 달리 왕이보는 딱히 슬퍼 보이거나,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언젠가 혼자 밥을 일처럼 먹고 있을 때 보았던 무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게 이상하게 더 샤오잔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그래선지 몰라도, 샤오잔은 왕이보한테 잘 모르는 주제에 뻔한 위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막상 해줄 말이 많지 않아, 빈약한 자신의 말주변에 한숨을 몰래 삼켰다. 왕이보는 그런 샤오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여긴 안 그래요. 늘어지게 자고, 먹고, 그냥 밖에 사람들이랑 차들 다니는 거... 안 나가고 계속 보고만 있어도 안 지루하네요. 신기하더라고요.”
샤오잔은 잠시 고민한 끝에 다행이란 말만 되돌려주었다. 왕이보는 픽 웃었다.
“고마워요, 잔 형.”
“어, 어어... 뭘.”
샤오잔은 고맙다고 말하는 왕이보에게 얼떨결에 대답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사실은 얼른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바깥 광경은 이제 샤오잔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인사를 받으며 보았던 장면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미소 덕에 슬쩍 접힌 눈가 아래로 둥글게 차 있는 왕이보의 광대에 햇빛이 비쳐 완만한 그림자를 만들던 것이 자꾸 떠올랐다. 명치께가 답답했다.
샤오잔은 왕이보 몰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손바닥을 오른손으로 몇 번이나 세게 주물렀다.
왕이보가 샤오잔의 집에 머무른 지 어느새 2주 정도가 지날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있는 일상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 왕이보는 샤오잔의 집뿐만 아니라 동네도 익숙해진 듯,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두른 채 훌쩍 나갔다 오는 일이 있었다. 때때로는 밖에서 뭘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 덕에 두 사람의 식사 자리에서 샤오잔은 왕이보가 동네에서 겪은 사소한 일을 듣게 되었다. 지나가다 만난 길고양이, 색색의 낙엽, 매일 다른 날씨, 동네 가게 상인의 무료한 표정, 버스 정류장에서 들은 학생들의 웃긴 대화들. 왕이보는 그런 것들을 얘기하며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그걸 듣는 샤오잔 또한 마찬가지로 퍽 즐거웠다.
“형은 동네에 카페 다 가봤어요?”
“아니? 너는 다 가봤어?”
“네. 궁금해서. 형은 새로운 가게 같은 거 생기면 안 궁금해요?”
“응. 나는... 그냥 한 군데 정해서 다니는 게 편하더라고.”
지금도 저녁을 먹으며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왕이보의 핸드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떨었다. 진동 소리에 왕이보가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놨던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형. 저 통화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어, 어어.”
왕이보가 식탁을 떠나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최근 들어 왕이보는 저렇게 전화가 오면 뭘 하고 있든 그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았다. 표정이 늘 애매하게 굳은 게 석연치 않아 보여 샤오잔 또한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왕이보가 겪었던 좋지 않은 일을 알아 짐작이 되니 더 그랬다. 하지만 먼저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어서, 샤오잔은 왕이보가 남기고 간 앞접시에 담긴 음식만 멀거니 바라보기 일쑤였다.
우연이었다. 최근 왕이보가 자리를 비우게 만드는 전화 내용을 알게 된 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담당자와의 미팅이 있어 좀 멀리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간단히 장을 보면서 왕이보가 지나가듯 맛있다고 말한 사탕을 한참 고민하다 끼워 넣은 샤오잔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집에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기 위해 평소엔 약간 어두워 잘 다니지 않는 뒤쪽 길로 발을 들인 샤오잔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저와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개 중 모자를 눌러쓴 뒷모습은 샤오잔이 잘 알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왕이보였다. 그리고 왕이보의 앞에는 중년의 남자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난감해진 샤오잔은 그대로 길의 가장자리로 옮겨붙은 후 뒤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마 그 찰나에 들려온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보야. 우리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그래도 내가 네 아빤데 봐줄 수 있잖아? 어? 도와줄 수 있잖아. 너한테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어?”
“...저 위약금 이번에 많이 물어서 드릴 돈 정말 없어요.”
“너 이렇게 연기하게 되고 그런 거 다 누구 덕인지 알잖아! 어떻게 이렇게 매정해! 유명해졌다고 뵈는 게 없냐? 부모가 어려운데 돌아볼 생각도 없어!”
칼같이 사람을 찌르는 말에 샤오잔은 숨을 삼켰다.
언젠가 제 누나에게서 대충 들었던, 그때는 그렇게 드물지 않은 사연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야기는 입으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이 너무 달랐다. 제게 한 말도 아닌데 쏟아진 말 속에 단어들이 마음속에서 서로 걸려 덜컹대는 소리가 났다. 뺨이며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와중에 왕이보의 대답이 샤오잔에게도 들렸다. 왕이보는 뭔가 쥐어짜듯 따져 묻기 시작했다.
“제가... 진짜로 매정했어요? 일하면서 번 거 태반은 아버지께 다 드렸었잖아요. 저 이제까지 그 돈 어떻게 됐는지 다시 물어본 적도 없었고, 돌려달라는 얘기 한 번을 안 했었고, 빚 문제로 기사가 났을 때도 제가... 아빠랑 엄마한테 화내지 않았잖아요. 책임도 물어본 적 없고, 다 해결했었고!”
“...”
“저 정말 오래 견뎠어요. 아버지 보기에 제가... 제가 그래도 매정해요?”
“이, 이 자식이!”
왕이보의 아버지가 거친 몸짓으로 팔을 뻗었다. 손이 향하는 방향이 꼭 왕이보의 멱살을 잡으려는 모양새라 그 순간을 참지 못한 샤오잔은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저기, 그만 하세요!”
“뭐, 뭐야?!”
왕이보의 아버지가 갑자기 끼어든 사람에 당황하는 틈을 타 샤오잔은 왕이보의 손만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왕이보의 아버지는 이 동네 길을 잘 모를 테니까 아마 쫓아오기 쉽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생각이 딱 맞아떨어져 샤오잔과 왕이보는 어렵지 않게 그를 따돌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 집에 들어오고 난 다음, 그제야 샤오잔은 왕이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나서 몸을 돌렸다.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만 걱정이 따라붙었다. 혹시 울까, 아니면 화났을까, 거기서 끼어든 일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몸을 돌려 샤오잔이 본 왕이보는 샤오잔의 걱정처럼 울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민망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샤오잔의 시선을 피하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샤오잔이 입을 떼기도 전에 왕이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보기... 좋지 않은 걸 보여줬네요. 형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 이보야. 잠깐만.”
“오늘은 들어가서 먼저 쉴게요. 형 잘 주무세요... 고마워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사과를 통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한 왕이보는 그렇게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샤오잔은 제가 사 왔던 막대 사탕을 몇 차례 만지작대다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한없이 쳐지는 기분을 안고 침대 위에서 구르다 선잠을 들었던 것 같은데, 깨고 보니 등허리가 쑤셨다. 왕이보는 제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쑤시고 욱신거리길래 팔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간단한 동작에도 팔이 지끈대며 온통 저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마는 자신도 알 정도로 펄펄 끓는다. 열이 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하자 왕이보는 더욱 정신이 혼곤해졌다. 배우 일을 하면서 일정이 빡빡해 피곤한 적이야 많았지만, 먼저 케어가 들어가기도 하고 긴장을 잡고 있어서인지 오히려 이렇게 손을 까딱하기도 어렵게 열이 나고 아픈 적은 드물었다.
머릿속이 열로 줄줄 녹아내리자 두서없는 생각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왕이보의 안을 마구 치고 빠져 헤집기를 반복했다.
왕이보가 처음 샤오잔의 집에 왔을 때, 현관문 앞에서 저를 보던 샤오잔의 얼굴도 그중 하나였다. 분명히 그때의 저를 보는 샤오잔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도 않았던 게 떠올랐다. 무심을 바탕으로 한 귀찮음과 난처함이 전부인 눈빛. 그 눈빛을 보고 역설적으로 따라오던 해방감이 이 순간 생각이 났다.
살면서 보통 왕이보가 받아왔던 시선은 대체나 선망이 주를 이루었고, 간혹 경멸 어린 부러움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왕이보 스스로 느끼기엔 그런 감정들은 늘 저 자신과는 동떨어진 구석이 있었다. 버겁게 꾸역꾸역 많은 걸 해치우고 숨기며 살아온 왕이보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는 늘 맞지 않는 무거운 외투를 오래 걸치고 다닌 것처럼 어깻죽지가 뻐근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동 차량에 올라타서나 겨우 걸리는 것 없이 숨을 쉬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최근 몇 주 왕이보는 샤오잔과 같이 지내며 그의 눈에서 무심에 이어서 다른 감정들을 발견했다. 가벼운 친절이나 눈에 익은 다음엔 반가움 같은 면도 볼 수 있었다. 더해서 안타까움이 섞인 걱정과 아득한 다정함까지도. 정말로 이런 시선을 제게 보낸 사람이 없었는가, 한다면 그것도 아닐 텐데 샤오잔이 보여주는 감정은 왕이보에게 이상하리만치 특별하게 느껴졌다.
오래 썩어오던 뿌리가 뽑혀 밑동이 나동그라진 상태에서 만난 사람이 그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혹은 그의 집과 동네에서 얻는 안온한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 공간의 주인인 샤오잔마저 왕이보에게 위로로 다가왔는지도. 그래선지 왕이보는 어느새 제 안에서 의미를 갖게 돼버린 그에게 치부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랬다. 뒤늦게 눈물이 날 것처럼 코가 매웠다. 눈이 뜨끈댄지는 오래였다.
“왕이보?”
문득 샤오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이보는 제가 헛것을 듣나 싶었는데 눈을 뜨니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샤오잔의 얼굴이 보였다.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샤오잔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가 곧 떨어지더니 샤오잔이 뭐라 말을 건넸지만, 누워 있는 왕이보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내 왕이보의 이마에 차갑게 젖은 수건이 올라왔다. 축축한 물기가 금세 열로 미적지근하게 데워지는 걸 느꼈다. 아마도 샤오잔이 제 간호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마가 약간 식으면서 시야가 약간 더 선명해졌고, 물에 빠진 듯 웅웅대기만 했던 소리도 좀 더 명확하게 들렸다.
“...너 너무 우네. 이러면 열 올라.”
샤오잔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단정한 손길이 왕이보의 눈가를 조심스레 훔칠 때, 왕이보는 멍한 상태에서 막연히 입에 걸리는 말을 뱉기 시작했다. 충동적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멈추기가 어려웠다.
“저 정말로 죽을 생각으로 그런 거 아니었어요...”
한마디 툭 꺼내놓은 왕이보의 까만 눈동자가 불안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샤오잔은 왕이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차렸으나 별다른 대꾸 없이 소매로 왕이보의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눌러 닦아 주었다. 왕이보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진짜 그때는 너무 잠이 안 와서요. 그래서. 요즘은 잠이 잘 와서, 안 먹어요...”
“그러면 됐어. 너 열 나니까 더 말하지 말고 이제 자.”
“잔 형... 오늘 여기 있어 주면 안 돼요?”
“...그럴게. 옆에 있을 테니까. 진짜로 자.”
몇 차례 진짜로 옆에 있을 거냐 확인하는 왕이보에게 거의 다짐을 해둔 샤오잔은 왕이보가 잠이 들 때까지 곁에 있었다. 이마 위에 올려둔 수건이 미지근해지면 꼬박꼬박 갈아주거나 땀을 닦아주며 있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왕이보의 조금 편해진 숨소리가 들렸다. 샤오잔은 그제야 왕이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어릴 적부터 일했던 사람이라 왕이보가 사회생활도 저보다 더 오래 했는데, 얼굴 곳곳에서 아직도 어린 태가 묻어났다. 생각보다 앳되고 정이 많아 여린 그가 겪는 일을 지척에서 보게 된 나머지 마음이 너무 쓰였다. 샤오잔은 얕게 한숨을 쉬다 입을 다문 채로 왕이보의 손을 잡아보았다. 열이 펄펄 나는 것에 비해 손이 많이 찼다. 몸이 안 좋은데, 커다란 손이 차기까지 하니 퍽 걱정이 되었다.
“손이 되게 차네.”
샤오잔은 왕이보의 찬 손을 양손으로 감싸 잡아 살살 문질렀다. 잠들기 전까지 내내 그렇게 했다.
길던 밤도 지나 아침이 왔다. 간밤 아팠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일어난 왕이보는 평소랑 다를 바 없이 집 안에서 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지냈다. 샤오잔은 왕이보가 정말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되어 흘끗거리며 살폈으나, 제 눈에도 별 이상이 없어 보이자 마음을 놓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것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달라진 부분이 전혀 없진 않았다. 왕이보가 부쩍 샤오잔에게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 늘었다. 왕이보가 시도하는 대화는 대부분 시시콜콜한 주제였다.
처음엔 음식이나 영화, 혹은 책이나 음악 같은 기호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샤오잔은 나름대로 성실히 대꾸했으나, 호구조사에 가까운 그런 주제는 뻔하디 뻔한 거라 대답하는 처지에서도 더 궁금한 것도 없겠다 싶어질 때쯤 왕이보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딱 듣기에도 말을 걸기 위해서 골몰한 주제라는 게 태가 나는 이야기였다. 예컨대,
“형.”
“어어.”
“형 혹시 코트 고를 때 뭐 봐요? 색? 핏? 올겨울엔 하나 살까 싶은데, 물건이 워낙 많으니까.”
“너는 나보다 좋은 옷 훨씬 많이 입어볼 거 아냐. 내가 고르는 기준이 도움이 되겠어?”
“당연하죠! 당연히 도움 돼요. 제 옷은 다 스탭이 가져와요. 저 완전 그런 거 잘 몰라요.”
제 나름대로 변명 아닌 변명을 다급하게 늘어놓는 왕이보의 얼굴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샤오잔은 전에 왕이보가 왕이보는 스태프들이 가져온 옷 여러 벌에서 하나하나 신경 써서 본인이 고른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인터넷에서도 기사에서도 종종 패셔니스타로 언급이 되는 걸 봤었다.
눈도 깜빡 안 하고 하는 거짓말에 샤오잔은 살짝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걸 다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눈을 감아주고 싶은 마음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왕이보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마저 저랑 자꾸 나누고 싶어 하는 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샤오잔은 이게 큰일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일단 혼용률이랑 핏? 너는 내 생각엔 옷 이미 많이 갖고 있을 거 같으니까 좀 유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다음에 같이 가서 봐달라고 해도 돼요?”
“...뭐. 그래. 그러자.”
이렇듯 지나가는 말로 다음을 기약하게 되면, 왕이보는 꼭 대단한 일을 성공시킨 사람처럼 들떠 했다. 아주 흔쾌히 약속해준 게 아닌데도. 왕이보가 그럴 때마다 샤오잔은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간질거렸다.
샤오잔이 왕이보를 데리고 도망친 날을 기점으로 한동안 왕이보의 전화는 조용했다. 방해가 없었던 덕분에 두 사람은 함께하는 식사 시간에 느긋하게 먹고, 정리까지 같이하면서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전화가 다시 걸려오기 시작했다. 왕이보는 처음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샤오잔도 잠깐 왕이보의 전화기를 흘끗거렸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한 번 다시 걸려오기 시작한 전화는 거침이 없어 툭하면 두 사람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계속 무시하던 왕이보도 어느 순간부터는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자리를 피해 다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왕이보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샤오잔에게 모른 척 말을 걸었고, 샤오잔도 모른 척 대답해 주었으나, 샤오잔은 왕이보의 이런 거짓말은 영 껄끄럽게 느껴졌다.
돈 문제에 가족 간의 일이라 샤오잔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방에 들어가는 왕이보의 등을 볼 때마다 샤오잔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회사에서도 아는데 어떻게 해달라고 하기는 곤란하다고 얘기했던 왕이보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었다.
왕이보는 점점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떠나, 아예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아 모습을 비추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지루하지 않아서 보는 게 좋다고 했던 바깥 풍경을 보는 일도 거를 때가 많아지면서, 샤오잔은 떠난 것도 아닌 왕이보의 난 자리를 느꼈다. 벌써 그러냐면서 자조도 했지만, 거실 중간까지 길게 들어오는 햇빛을 봐도 전과같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샤오잔은 간만에 동네 카페에서 누나를 만났다. 왕이보와 같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은 만나 이야기해야 했었다. 샤오잔에게 누나는 회사에서 여론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있는지, 언제쯤 왕이보의 복귀를 재고 있다는 얘기를 푸념처럼 줄줄 늘어놓았다.
샤오잔은 그 모든 얘기를 조용히 듣다가 안부를 묻자 왕이보가 잘 지낸다는 얘기를 간단하게 했을 뿐이었다. 왕이보의 아버지가 찾아왔다거나, 전화를 지속해서 걸어오는 것, 열이 나고 아팠었다는 이야기는 샤오잔이 말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누나는 워낙 일이 바쁜 탓에 금방 일어나야만 했다. 누나를 먼저 보낸 샤오잔은 테이블 앞에 한참 커피를 놓아두고 누나가 일러준 왕이보의 복귀 시기를 가늠해봤다. 왕이보는 대략 제집에서 열흘 정도나 더 머물게 될 것 같았다. 열흘… 같이 있을 수 있는 기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자 불현듯 초조해진 샤오잔은 반 이상 남은 식은 커피를 카운터에 대충 올려두고 카페를 나섰다. 이유도 모른 채 서둘러 발을 옮겼다. 마음이 초조해지니 늘 다니는 익숙한 동네인데도 처음 오는 길 마냥 낯선 기분이 들었다. 신호등의 빨간 불을 기다리면서도 손가락끼리 끄트머리에 달린 거스러미를 계속 문지르며 건드렸다. 계획도 없이 막연하게 덜컹대는 마음을 안고 현관문을 연 샤오잔은 어둑한 거실 한 가운데 서 있는 인영을 마주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던 왕이보였다. 샤오잔이 문을 벌컥 열어젖힌 탓에 왕이보와 눈이 마주쳤는데, 왕이보의 지친 눈이 순식간에 무안함으로 젖어갔다.
왕이보 뺨에 닿은 핸드폰에서 어렴풋하게 들리는 거세고 날카로운 억양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 대고도 아무 대꾸도 없는 왕이보.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샤오잔은 그대로 왕이보의 핸드폰을 뺏었다. 뭐라고 격앙된 소리가 들려왔지만, 들을 생각도 없이 샤오잔은 답지 않게 화를 냈다.
“그렇게 사는 거 부끄러운 줄 아세요.”
전화를 끊고 신경질적으로 왕이보의 핸드폰을 전원까지 종료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정신이 든 샤오잔은 왕이보에게 조심히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얼굴을 몇 차례나 쓸어내렸다. 순간 화가 나 저질렀지만,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샤오잔이 침을 삼키며 왕이보를 보았다. 왕이보는 심란하고 멋쩍은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을 고르는 모양이라 샤오잔이 먼저 선수를 쳤다.
“미안해. 내 멋대로 해서.”
“...아니에요.”
“정말 너도... 너무 물러. 왜 그런 소리를 다 듣고 있어. 그러지 마.”
속상한 마음에 여과되지 않은 말이 줄줄 나왔다. 왕이보는 샤오잔의 말에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샤오잔이 고개를 들어 왕이보를 보았다. 왕이보는 무언가 꾹 눌러 참는 얼굴로 샤오잔을 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한눈에 보이게 왕이보의 시선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왕이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별로 상관없어요. 깊게 담아두지도 않고.”
“그래도. 그래도 그러지 마.”
“잔 형.”
“...어?”
“저한테 다정하게 해주는 사람 사실 형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촬영장만 가도 주변에 어른이 많고, 저는 완전 어릴 때부터 일했으니까. 그치만 형은... 다르네요.”
갑자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에 샤오잔이 입을 다물었다. 긴장감이 쭈뼛 올라왔다. 왕이보는 가까스로 웃는 낯을 하고 물어 왔다.
“저 형이 좋아요.”
“...”
“만나 달라고 그러지 않을게요. 어려운 거 아니까... 그냥 좋아하기만 할게요.”
제 고백에 샤오잔의 대답이 필요한 게 아니었는지,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다가와 어깨를 살짝 끌어안더니 뭐라 속삭이고는 망설임 없이 떨어져 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샤오잔은 왕이보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도 한참을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샤오잔은 힘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자꾸 왕이보가 제게 속삭이고 간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고마워요. 형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왕이보는 과연 그 한 번의 고백 이외에는 어떤 요구도 해오지 않았다. 게다가 먼저 고백한 사람답지 않게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굴었다. 오히려 샤오잔이 더 쭈뼛대며 왕이보를 어색해하는 모양새였다. 왕이보가 별일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게, 얼마 전 있던 일을 무마하고 싶은 의도가 보이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샤오잔도 그걸 알았다.
다만, 전부를 숨기지는 못해서 왕이보가 샤오잔을 보는 눈빛에는 늘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은은하게 엿보이는 호감이 선명해서 그걸 보던 샤오잔이 먼저 까닭 모를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기 일쑤여서 대화 가운데 마가 뜨는 순간이 많아졌다.
샤오잔은 이런 어색함을 견디는 데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사람이었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이후에 새로운 인간관계는 간만이라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이 어색함이 싫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단지 대답을 섣불리 할 수는 없었고, 성격상 왕이보의 고백을 모른 척하고 그를 편하게 대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게 겨우 익숙해졌던 두 사람분의 일상이 애매하게 겉도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균열은 뜻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샤오잔은 여느 때처럼 방에서 한참 작업을 하는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누나에게서 급하게 걸려온 연락이었다. 누나에게 급하게 걸려온 연락이 샤오잔에겐 반가운 소식이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샤오잔은 태가 나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무슨 일 있어?”
“잔. 혹시 이보 무슨 일 있었어?”
“어?”
누나가 대뜸 묻는데에 뜻밖의 이름이 거론되어 샤오잔이 맹한 목소리를 냈다. 같이 지내고 있었으니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묻는 분위기나 이름 뒤에 붙은 '무슨 일'이 샤오잔에겐 뜻밖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야 했었지만, 누나에게 얘기해야 할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샤오잔이 말을 고르고 있던 사이에 너머에서 먼저 말이 이어졌다.
“...걔가 엊그제 연락이 왔는데, 좀 빨리 돌아가도 되냐고 그래서. 자기 이제 괜찮고, 혼자 있는 게 못 미더우면 매니저 붙여도 상관없고, 그것도 불안하면 전문가한테 상담도 받겠다고 하길래. 그래서 혹시 무슨 일 있었나 싶어서. 아니면 아는 거 없어?”
“어... 어. 없어.”
“그래? 일단 알겠어. 혹시라도 뭐 알게 되면 좀 봐서 알려줄래?”
“...그럴게.”
그렇게 짧은 통화가 마무리되고, 일단 전화를 내려놓은 샤오잔은 액정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선을 긋고, 지우고, 선을 긋고, 다시 선을 긋다가 전부 지우고, 같은 위치에 선을 또 긋고 나서 액정을 한참 노려보던 샤오잔이 신경질적으로 펜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작업은 아까 그 자리에서 진전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흐름이 끊긴 것도 한몫했으나, 자꾸 왕이보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탓이 컸다.
고작 스무날가량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 하지만 왕이보에 대해 알아갈수록 왕이보가 자라온 시간이 어땠는지 어렴풋하게 보여서, 그게 샤오잔의 신경을 자꾸만 잡아챘다. 그렇게 왕이보는 제 안에서 존재감을 공고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처음 왕이보를 머물게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지 망설였던 게 무색하게도 샤오잔은 왕이보가 남은 시간보다 빨리 돌아가겠다고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속이 꽉 막혀 눌렸다.
‘저 형이 좋아요.’
왕이보가 고백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또렷하지만 흔들리고 있던 눈동자를, 낮고 단단해도 떨리던 목소리가. 샤오잔은 결국 대강 겉옷을 걸치고 지갑을 챙겼다.
왕이보는 근래 들어 제일 깊은 잠을 잤다. 샤오잔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잘 자던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잠든 것도 처음이었다. 분명 낮에 침대 위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깨고 보니 저녁을 넘어서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시간을 보고 놀란 왕이보가 머리를 연거푸 쓸어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집주인은 집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최근 제가 고백을 한 다음에 샤오잔이 여실히 저를 어색해하면서도 같이 하는 식사를 빼놓은 적은 없었는데, 이 시간까지 깨우지 않았던 게 집에 없어서였나 싶었다.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어디냐고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고 부엌 찬장을 열어 과자를 대강 꺼내 씹었다. 기껏 먹기 시작했는데, 혀에 닿는 몇 조각만으로도 영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왕이보는 입맛이 똑 떨어진 탓에 과자를 정리했다. 그리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틀었다. 공간은 금세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왁자지껄한 티브이에 묵묵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왕이보의 신경은 온통 핸드폰에 쏠려 있었으나, 기다려 봐도 핸드폰은 영 잠잠했다. 샤오잔에게 오늘 일정이 있다는 얘기를 딱히 들은 적은 없었고,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어 열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왕이보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샤오잔이 어디 가서 험한 일을 당할 만큼 마냥 연약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잠시 거실에서 서성대던 왕이보는 결국 신발을 꿰어신고 집을 나섰다.
[잔 형 오늘 일있어요?]
[약속?]
[형 어디에요]
[보면 연락해줘요]
메시지 창에는 몇 분 간격으로 제가 보낸 메시지만 띄엄띄엄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왕이보는 마음속에서 넘실거리는 조마조마함을 어쩌지도 못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둘러보기 시작했다. 샤오잔이 자주 다니는 길목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카페, 가게 앞 등지를 돌아다니다 번번이 허탕을 친 왕이보는 혹시나 해서 집 근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제 연락을 못 듣고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으니까. 샤오잔을 찾아다니는 내내 연락을 걸고 있어서, 왕이보의 핸드폰은 어느새 뜨끈해진 지 오래였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새로 전화를 거는 순간, 멀리서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렸다. 샤오잔의 핸드폰 소리를 이정표 삼아 왕이보가 도착한 곳은 샤오잔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놀이터 벤치였다. 벤치엔 기다란 인영 하나가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멀리서 봐도 샤오잔이라 왕이보는 거의 뛰어가다시피 그 앞에 가서 섰다. 샤오잔이 맞았다. 샤오잔은 잔뜩 취해서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샤오잔은 주량이 약해서 스스로 이렇게 될 때까지 마시는 일 자체가 드문 편인데, 이런 모양을 봐선 뭔가 일이 있었나 싶어서 덜컥 걱정이 올라왔다. 왕이보가 황급히 샤오잔이 앉아있는 벤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샤오잔은 그제야 제 시야에 왕이보가 들어왔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왕이보는 샤오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형. 술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너 때문에 심란해서. 자꾸 고민돼.”
돌아온 대답이 예상치 못한 것이라 왕이보는 잠시 멍하니 샤오잔을 보다가 다시 물었다.
“나 때문에요?”
“어. 너 때문에. 내가... 뭘 해도 후회할 거 같아서 속이 복잡해 죽겠어.”
샤오잔의 입에서 한숨이 깊게 새어 나왔다. 복잡한 마음이 켜켜이 묻어났다. 샤오잔의 말을 알아듣긴 알아들은 왕이보 또한 샤오잔이 저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어차피 뭘 해볼 생각도 아니었는데, 말하지 말 걸 그랬다고 내내 몰래 후회하던 탓이었다.
그 와중에 한숨을 푹푹 쉬는 샤오잔이 혹시나 해서 왕이보는 몸을 약간 더 비틀어 샤오잔의 얼굴을 기웃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샤오잔이 울지 않는 걸 확인한 왕이보가 내심 안도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왕이보는 샤오잔이 깊게 고민하지 않았으면 싶어서 말을 골랐다. 자신은 계획에 없는 고백을 해서 후회도 했지만, 또 기대를 버릴 수 있어서 실은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샤오잔은 사람이 좋아 이런 상황에서 마주한 마음도 쉬이 내버려 두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지만, 굳이 안 할 마음고생까지 떠맡게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왕이보가 쭈그려 앉은 그대로 중얼거렸다.
“잔 형. 보면 형이야말로 사람이 진짜 물러요.”
“...어?”
“고백한 거, 깊게 고민하지 말아요. 형 고민하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전 그거 없는 일로 해도 돼요. 형이랑 뭐 어떻게 한다는 기대도 안 했어요.”
왕이보가 괜히 멋쩍어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걸 본 샤오잔의 인상은 오히려 잔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진 괜찮더니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샤오잔에 왕이보가 진심으로 당황했다. 큰 눈가 주변에 열이 오르는지 불그스름했다.
“왜, 왜 그래요. 울지 마요.”
왕이보가 소매를 끌어다 눈가를 찍어 옅게 배어 나온 물기를 훔치는데, 샤오잔이 왕이보의 손을 살짝 잡아 내렸다.
“이보야... 너 자주 그랬어?”
샤오잔의 질문에 왕이보가 말을 멈췄다. 자의는 아니었다. 그 물음이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아 입이 저절로 다물린 것에 가까웠다. 샤오잔이 한숨을 푹푹 쉬며 왕이보의 한 손을 양손으로 감싸 잡았다. 바람 때문인지 또 차가운 살갗이 잡혀 샤오잔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왜 욕심을 내다 말어.”
왕이보는 그제야 샤오잔이 제게 한 질문의 의미를 이해했다. 역시 이 사람이 주는 다정함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 왕이보는 불현듯 속이 허했다. 그래도 그 앞에서 울고 싶진 않아 목울대를 꾹꾹 눌러가며 이것저것 생각나는 이유를 들었다.
“가능성이... 별로 없잖아요. 솔직히 우리 평소에 멀고, 나 바쁘고, 형한테 그런 거지 같은 모습까지 다 들켰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걸 단념하기에 차고 넘치는 이유였다. 서로 확신을 갖기에 너무 어려운 조건임이 분명했다. 그걸 샤오잔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왕이보가 침착을 가장하고 꺼내는 말이 아팠다.
저보다 여섯이나 어린 눈앞의 왕이보가 그간 했을 생각들이 여실히 헤아려진 탓이었다. 아마 그날 했던 고백도 채 갈무리되지 못한 왕이보의 감정이 틈을 충동적으로 비집고 나왔을 거였다. 방금의 왕이보는 그걸 다시 한번 수습하려던 모양이었지만, 샤오잔은 왕이보가 그럴수록 오히려 왕이보의 모습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왕이보.”
그래서 샤오잔은 조금 충동적으로 굴기로 했다.
“너 그냥... 욕심 내볼래?”
“...무슨 뜻이에요?”
“만나보자는 말이잖아. 난 그래 보고 싶다고.”
“...”
“너랑 나랑 먼 거 알고, 너 바쁜 것도 알고, 다른 일도 봤으니까 아는데. 같이 어떻게든 해보고 싶...!”
샤오잔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왕이보가 샤오잔에게 달려들어 제품 가득 샤오잔을 끌어안았다. 틈 하나 주지 않겠단 것처럼 팔에 힘을 줘서 여러 차례 고쳐 안은 왕이보 덕에, 샤오잔의 귀를 왕이보의 머리카락이 몇 번이나 간지럽혔다. 이내 왕이보가 이마를 샤오잔의 어깨에 파묻은 채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형. 난 시작하면 끝까지 하는 사람인데.”
“...그래?”
“막상 겪었더니 얘랑 만나는 거 생각보다 힘들다 해도 난 몰라요. 취소 못 해요.”
들어본즉슨, 형이 저를 먼저 헤집어놨으니 중간에 무르고 싶어도 못 한다는 이야기였다. 샤오잔은 마땅한 대답을 골라보다가 찾지 못해 고개만 주억이며 왕이보의 등에 제 손을 둘렀다.
샤오잔이 창문가에 앉아있던 왕이보의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왕이보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새집도 꽤 좋은 것 같아. 햇빛이 잘 들어서 밝은 게.”
“내가 큰맘 먹고 너랑 나름 가까운 데로 이사까지 했는데, 넌 일주일이나 지나서 와놓고 아부가 그게 다야?”
“내 스케줄 알면서 좀 심술... 그리고 샤오 선생이 이 집에 살아서 좋다고 하는 건 아부가 아니잖아. 사실이지.”
“...허. 샤오펑요. 진짜 말은 잘하네.”
“샤오펑요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럼 뭐. 대 배우님이라 해줄까?”
“...형은 여섯 살이나 형이면서 나한테 한 마디도 안 져주네.”
“내가 진짜 너한테 착실한 형 노릇 했으면 너 못 만나지.”
“그래. 그냥 다 이겨 먹어라.”
아하하. 귀여워. 입술이 슬쩍 나온 왕이보를 보며 샤오잔이 크게 웃었다. 샤오잔의 접히는 눈이며, 예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며 왕이보는 문득 마음이 통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날, 샤오잔이 말했던 것처럼 둘은 같이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나름의 관계를 꾸려가는 중이었다. 과정들이 생각보다 퍽 행복해 왕이보는 때론 그때 완전히 포기했으면 어땠을지 가늠해보다 진심으로 안도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왕이보는 내심 감사한 마음으로 샤오잔에게 몸을 슬그머니 기대왔다.
“이번 주 피곤했어?”
“응.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피곤했어.”
“역시 말을 정-말! 잘하네.”
왕이보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샤오잔은 작게 웃으며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고쳐 틀었다. 자세가 바뀌자 우연히 다리 위에 제멋대로 편하게 늘어뜨린 왕이보의 손이 보였다. 하얀 볕이 그의 두 손바닥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왕이보의 손이 오늘은 예전과는 다르게 차갑지 않게 느껴졌다. 샤오잔의 입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손이 따듯해 보이는 게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기꺼웠다.
fin